3. 폭발성에 대한 추적

폭발성에 대한 추적







이 일련의 경험은 내게 수많은 의문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이 독특한 에너지의 정체였다. 특히, 이 에너지가 왜 이렇게 폭발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왜였을까? 대체 무엇이, 어떤 연원이 이 에너지가 이토록 폭발성을 띠도록 만들었을까? 



폭발성에 대한 추적


지금부터는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느낀 바를 서술하고자 한다. 아직 과학적/학문적 논증 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관련 자료도 미비하지만, 이 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밝힌다. 

일단, 내 이해해 따르면 이 에너지가(앞으로는 ‘근원 에너지’라고 부르자) 이렇게 폭발했던 것은 단순 명료하게 말해 그동안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면(여기서 ‘그동안’은 전생과 같은 보다 폭넓은 시간을 포함하겠다) 분출이란 것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그때 흐르며 우리가 표현하도록, 만들어 내도록, 움직이도록 우리를 성장시키고, 완성하며, 드러내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해한 이 에너지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러한 에너지가 어떤 연유로 억압되었고, 차단되었고, 감추어졌다(이렇게 근원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순환을 가로막는 반대 성질의 에너지를 ‘장막 에너지’라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흐르지 못한 에너지는 계속 고이고 축적되었다. 게다가 두 에너지 사이의 압력은 세월이 갈수록 커졌다. 이는 속성 자체가 흐르고 펼쳐져야 하는 근원 에너지와 이를 지속해서 막는 장막 에너지 간에 발생하는 필연적 결과였다. 그런데 그때 어떤 연유로 그러한 장막 에너지에 금이 가고, 손상이 가게 된다(‘어떤 연유’의 대표적인 예로는 정화 작업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계속된 충격이 더해진다. 그러자 마침내 그리도 견고하던 장막 에너지 전체 혹은 한 층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리고 만다. 이때, 이 무너진 장막 에너지뿐만 아니라 그 안에 갇혀 있던 근원 에너지까지 한꺼번에, 그간 가해지던 압력의 반대 방향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분출’이라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댐의 둑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고여있던 물이 세차게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이러한 논리는 역시 내 경험에 근거한다. 실제로 앞에서 밝힌 ‘폭발’ 과정에서 순수하게 근원 에너지라 부를 수 있는 것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앞의 글에서는 창조성 발현의 측면에만 집중해서 설명하느라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와 거의 비등하게 이를 가로막고 있던 에너지, 나의 근원 에너지를 둘러싸고 있던 장막, 찌꺼기, 블록(blocks), 부정성이라 부를만한 에너지도 함께 쏟아져 나왔다. 이미지를 통해, 감정을 통해, 호흡의 온기, 질감, 색을 통해, 몸의 통증과 같은 감각을 통해, 때로는 어떤 냄새로 느껴지는 형질을 통해, 목소리와 언어를 통해 형상화되고 빠져나갔다.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실제로 내게서 빠져나갔다고 표현할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상운 작가님의 거울 명상을 참조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창작 활동과 함께 빠져나가는 것 같기도 했고(즉, 근원 에너지와 함께 빠져나가기도 했고), 독자적으로 이 에너지만 집중적으로 내보내야 하기도 했다. 이런 측면은 이전의 정화 주기 및 그 순환 과정에서도 일면 경험한 바가 있었지만, 그 강렬함과 정도, 형태 면에서 그 차이는 상당했다. 훨씬 대대적이고 선명하고 강렬했다. 만일 오랫동안 읽고 접해오던, 또한 때마침 등장하곤 하던 영적 각성에 대한 가르침이나 정보가 없었다면 그렇게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이 현상의 기저 원리를 이해할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만큼 두텁고 강력한 장막 에너지였던 것이다. 이 정도의 장막 에너지이니 그렇게 장기간에 걸쳐 쏟아져 나올만한 근원 에너지의 흐름도 완전히 차단하고 가로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논리는 내가 그간의 의식 성장 과정 중 지속해서 겪었던 일종의 순환 주기도 잘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사실, 이 점진적 과정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과정 끝에 '폭발'에 다다랐기에 위와 같은 에너지 간의 관계, 작용, 흐름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를 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한 번의 주기에 일어났다면 나는 이미 목숨을 다해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이를 관찰할 새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지속해서 내 존재에 걷혀 있던 막을 거두어 내고, 또 거두어 내고 거두어 내다가, '금'을 내고 또 내다가 알이 깨졌기에 드러난 현상이었다. 그렇게 내 안에 가장 두텁던 어떤 막까지 다다랐고, 그것마저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기에 드러난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에너지 분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특정한 몇몇에게만 발생하는 모종의 신비 체험으로 봐야 하는가? 내 생각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저 우리 의식 작용의 원리를 파헤쳐 살펴보면 이해될 만한 상식선의 일이다. 물론, 그 에너지가 드러나는 형식 -이미지, 끊임없는 창작 활동, 신체적 증상 등등-은 낯설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에너지의 속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렇다. 에너지가 몸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고 드러나고 쓰이는지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할 때 그렇다. 만일 본디 구체적 형상 없이 존재하던 에너지란 존재가 몸을 통과하면서 의식의 표면적 차원에서 감각적 형상 및 실체적 형상을 부여받은 것으로 이해된다면, 그저 본디 ‘우리 자신의 일부’이던 것이 감각을 통해 그 존재성이 드러난 것으로 이해된다면, 형상 없이 존재하던 것이 형상을 통해 드러나는 순간이 의식에 의해 포착된 것으로 이해된다면, 이는 그저 우리가 그간 충분히 관측하지 못했던 ‘실재’가 되게 된다. 물론, 이를 포착하는 민감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민감도의 차이 때문에 이 현상이 신비 현상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이와 같은 분출 과정이 이루어지는 와중에도 개인의 의지와 의식은 여전히 또렷이 살아서 함께 간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나는 매 순간 내가 나 자신과 하는 일종의 약속처럼 스스로 선택해서 나아갔다. 즉, 스스로 선택해서 그 분출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지도록, 통과해야 마땅한 것을 충분히 통과하도록, 자리를 마련해주도록 선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자처하여 진척시켰고, 온갖 감각적 경험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마주하기를 기꺼이 원했다(이는 순전히 호기심 차원에서). 속도 또한 늦추지 않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보는 게 더 맞다(이 부분에서는 Brian Weiss 박사님 및 다른 의식의 작용을 다루는 스승들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래서 때로 그 과정이 나를 압도할 것만 같아 온갖 두려움이 올라와도 근본적으로는 안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선택을 통해 정도를 조정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 분출을 막는 것을 선택했을 때 정신적 역작용이 발생하지 않았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그 무의식의 과제는 사라지지 않고 지속해서 내 의식적 차원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의식은 이러한 과정에서 여전히 조종키를 쥐고 있었다. 의식이 사라지거나,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식의 신비한 현상은 전혀 아니었다는 말이다. 내 생각에 그런 편견은 이런 부류의 경험에 대한 두려움 혹은 일종의 혐오감에서 기인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이 현상은 의식적 차원에서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이러한 폭발의 과정은 우리 모두가 경험할 만한 일인가에 대해서도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이 에너지 간의 원리 자체는, 더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밝히자면, 우리 모두의 창조성 발현의 기저 원리다. 이 에너지 간의 작용과 흐름, 그 각각의 기능과 역할이 밝혀지면 우리는 우리의 창조성 발현에 한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폭발'의 현상에 있어서는 이것이 우리 모두가 겪을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정확히는 그럴 필요가 없다. 위 논리에 비춰보았을 때 만일 당신이 자신의 근원 에너지를 잘 순환시키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까지 갈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런 당신이 경험할 만한 성격의 일이 아니다. 당신의 에너지는 이미 모든 차원에서 살아 숨 쉬며 당신을 통해 잉태해야 마땅한 것을 잉태하고 있을 것이다. 동기라는 이름으로 혹은 영감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아무 이름도 없이 당신의 생각, 아이디어, 감정, 움직임을 이끌며, 그 덕에 몰입하고 감동하고 충만하도록 이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성장하고 자유롭고, 확장되도록 도와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에너지 간에 어떤 압력도 발생하지 않으니, 에너지의 흐름 자체에 대해서는 인지조차 못 했을 수도 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 에너지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 자체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얼마나 자신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재고해 봐야 할 부분이기는 하다. (그리고 현대에만 그럴까? 과거에는 그러지 않았을까? 과연 우리가 이러한 자연스러운 존재의 흐름을 포용하면서 살았던 시대와 세상이 있었을까? 이는 혹시 지금의 시대이기에 이야기해 볼 만한 주제이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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