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그리고 무엇에 관하여


왜, 그리고 무엇에 관하여






 왜 연구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는가?


 이에 대해 설명하려면 내 개인적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참 이상하게도 나는 내 예술적 욕구를 표현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거의 반드시 무의식 정화 과정을 먼저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순서로 삶이 펼쳐졌다. 늘 내 안의 무언가에 의해 내 표현력은 억압 및 억제, 회피되거나 차단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발현하려면 그와 얽히고설킨 감정의 골 혹은 기억의 골, 때로는 그 너머의 무언가를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 3년간 집중적으로 겪은 내적 성숙 과정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자아실현 전체 여정이 그러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다양한 지혜를 동원해야만 이해가 진척되었다. 그래서 전통적 심리학적 접근법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적 지혜와 스승들의 직간접적인 가르침을 자연스레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애초에 예술의 길에 들어서는 시기도 늦은 편이었으며, 그 과정도 꽤 더디었다. 늘 다음 단계, 또 그다음 단계의 영혼의 성숙을 위한 과제가 나타났다. 아마 이것도 그 단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제대로 정리해 보아야 할 것 같은 주제가 지속해서 머릿속에서 돌고 돌며 떠올랐다. 내가 어디까지 풀어낼 수 있을지, 그리고 풀어내야 할지 확신이 없는데도 그랬다. 그 주제란 바로 무의식의 정화 및 존재 상태의 개선과 창조성 발현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창조성은 개인의 존재 상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무엇보다 개인의 무의식적 존재 상태가 개선되면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선물과 같은 것이었다. 막고 있는 것을 놓아주면 풀리는 물줄기였다. 하지만 대중적 논의는 의식의 표면적 차원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에 대한 전문적 논의 및 정보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물론, 영적 스승 및 가르침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기는 했다. 그 가르침은 늘 우리가 본래의 모습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켜 주었고, 그 길은 우리의 타고난 예술성 및 창조성의 발현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본질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그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자세한 정보를 원했다. 보편적 진리의 차원에서 뭉뚱그려진 게 아니라 정확히 이 문제에 대한 세분화된 설명을 원했다. 예를 들어, 존재 상태가 달라지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겪으면 어떤 예술적 자유가 열리는지 왜 아무도 말하지 않을까?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일까? 답답했다. 또한, 이와 관련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학문적인 양질의 연구 자료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아니었다. 이런저런 책에서 힌트를 긁어모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즉,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활발히 다루어질 만한 주제였으나, 현실은 여러모로 그러지 않은 듯했다. 


  그러자 역으로 많은 것이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동안 이러한 주제를 직접적으로, 충분히, 제대로 다루지 않았기에 예술성을 둘러싼 그토록 많은 허상과 거짓이 판을 치는 것이었다. 이 미지의 영역은 미지로 남아 있었기에 예술가 및 예술성, 창작성에 대한 수많은 거짓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거치고도 여태껏 살아남아 우리의 무의식 저변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래서 중세 시대에나 있을 법한 미신적, 마술적 믿음과 편견이 지금까지도 기세등등해 우리의 창조성을 좀 먹고 그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되지 않나 싶었다. 이러한 시대착오적 사고의 패턴, 무의식적 믿음 때문에 우리의 자유가 계속 속박받는 것은 옳지 않은 듯했다. 물론, 예술성 및 창조성 자체에 대한 과학적/학문적 접근이 아예 불가능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가? 지금은 신비주의적 앎도 양자물리학이라는 과학으로 이해되고 풀이될 수 있는 시대이지 않은가? 이러한 시대에 예술성 및 창조성에 대한 인지 수준만 신화적 상태에 머물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있을까? 이를 밝힐 시대적 역량은 이미 충분한 듯했다. 즉, 이제 이 영역도 그 작동 원리가 의식적 차원에서 충분히 밝혀지고 이해 및 인지되어, 오랜 세월 우리 영혼을 옥죄던 사슬이 있다면 모두 끊어버려야 옳았다. 한낱 거품은 녹아 사라져야 옳았다. 수많은 거짓은 그만 힘을 잃어야 옳았다.


  또한, 이는 시대적 과제로 보였다. 우리의 창조성 자체에 대한 탐구는 우리의 자아실현 전반의 과정을 앞당겨 시대의 진보에 기여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전 세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풍족한 경제, 사회, 문화 속에 살고 있으며, 과거에 우리가 시달렸던 수많은 한계성을 극복해 냈다. 그 덕에 우리는 이제 각 개인의 자아실현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시대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아실현의 길목에서 창조성 발현이라는 화두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관문이 아니었다. 우리 각각의 독특성의 표현이 자아실현의 근간이고 그것은 곧 우리 고유의 창조성의 실현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렇다면 창조성의 근원과 그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저해해 왔던 요소를 명명백백히 밝히는 일은 우리의 자아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공산이 컸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우리가 이러한 창조성 말고 더 파보아야 할 것이 남아있는가? 우리가 우리 인간만이 발휘할 이 독특한 특성 말고 더 추구할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 거대한 자유를 마다할 이유가 있나 싶었다. 즉,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미래를 대비하는 오늘날의 올바른 방향성으로 보였다.

  

 그래서 결국, 나는 이 연구를 자체적으로라도 진행하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어차피 지속해서 떠오를 주제라면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지금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더라도, 내 개인적 경험을 글로 풀어내는 것 정도는 해볼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이 모든 사고는 내 개인적 경험에서 촉발되었고, 그것을 말과 글로 풀어내는 과정 없이 그 연구가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또한, '자기 경험에서 출발하는 것, 그것이 결국 한 인간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향성이지 않을까?’하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연구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하기를 소망한다. 어쨌든 그렇게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연구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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